스토쿠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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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토쿠 천황은 도바 천황의 아들로, 1123년 5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141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도바 상황의 섭정을 받았으며, 후지와라노 기요코를 중궁으로 맞았으나 자녀는 없었다. 도바 상황의 양위 강요로 인해 고노에 천황에게 양위한 후, 1156년 호겐의 난에서 패배하여 사누키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불교에 귀의했으나, 고시라카와 천황의 냉대 속에 1164년 사망했다. 이후 원령으로 여겨져 숭배받았으며, 메이지 시대에 시라미네 신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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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쿠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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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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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아키히토 (顕仁, Akihito) |
묘호 | 스토쿠 천황 (崇徳天皇, Sutoku-tennō) 또는 스토쿠인 (崇徳院, Sutoku-in) |
별칭 | 신인 (新院, Shin-in) 사누키인 (讃岐院, Sanuki-in) |
출생일 | 1119년 7월 7일 |
사망일 | 1164년 9월 14일 |
능묘 | 시라미네노 미사사기 (白峯陵, Shiramine no misasagi), 가가와현 |
재위 | |
재위 기간 | 1123년 2월 25일 ~ 1142년 1월 5일 |
즉위 | 1123년 3월 18일 |
선대 천황 | 도바 천황 |
후대 천황 | 고노에 천황 |
연호 | 덴지 다이지 덴쇼 조쇼 호엔 에이지 |
가계 | |
아버지 | 도바 천황 |
어머니 | 후지와라노 타마코 |
배우자 | 후지와라노 기요코 |
자녀 | 시게히토 친왕 가쿠에 겐마쓰 |
섭정 및 관백 | |
섭정 | 도바 천황 (1123년-1156년) |
관백 | 후지와라노 타다미치 (1129년–1141년) |
관직 | |
태정대신 | 미나모토노 마사자네 (1123년-1124년) 후지와라노 타다미치 (1129년) |
2. 계보
도바 천황과 중궁(中宮)인 후지와라노 쇼시(다이켄몬인)의 제1황자로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고지단》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키히토 황자의 친아버지는 사실 도바 천황의 할아버지 즉 황자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한 시라카와 법황이며, 법황이 다마코와 밀통하여 얻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도바 천황은 아키히토 황자를 가리켜 '숙부 아들'이라 부르며 꺼렸다고, 《고지단》은 전한다.[42]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진위 여부가 확인된 바가 없다.
- 중궁: 후지와라노 기요코(1122년∼1181년) - 후지와라노 다다미치의 딸. 원호는 고카몬인.
- 효에노스케노 쓰보네 - 호인 신렌의 딸로 미나모토노 유키무네의 양녀.
- * 시게히토 친왕(1140년∼1162년)
- 미카와노곤노카미·미나모토노 모로쓰네의 딸
- * 가쿠에(1151년∼1184년)
- 가라스마루노 쓰보네
2. 1.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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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조 천황 |
-|-|-|v|-|-|-|-|-|-|-|-|-|-|-|v|-|-|-|.| | |
시라카와 천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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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카와 천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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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바 천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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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쿠 천황 |
| |- | |!| | | |!| | |- | 시게히토 친왕| | |!| |- | | | | | |!|}}|}} |} 3. 약력
겐에이 2년(1119년) 5월 28일에 도바 천황과 후지와라노 쇼시(타이켄몬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6월 19일에 친왕이 되었다.[43] 호안 4년(1123년) 정월 28일에 다섯 살의 나이로 황태자가 되었고,[43][6] 같은 날 도바 천황의 양위를 받아 천조하였다.[43] 2월 19일에 즉위식을 행하여[43] 3세 7개월(세는 나이 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3. 1. 어린 천황겐에이 2년(1119년) 5월 28일에 도바 천황과 후지와라노 쇼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6월 19일에 친왕이 되었다.[43] 호안 4년(1123년) 정월 28일에 다섯 살의 나이로 황태자가 되었고,[43][6] 같은 날 도바 천황의 양위를 받아 천조하였다.[43] 2월 19일에 즉위식을 행하여[43] 3세 7개월(세는 나이 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다이지 4년(1129년), 간파쿠 후지와라노 다다미치의 딸 후지와라노 기요코가 입궁하여 비가 되었고,[43] 같은 해 7월 7일에 시라카와 법황이 사망하면서 도바 상황이 인세이를 시작했다.[43] 1124년 덴지 원년 2월 상황 시라카와와 상황 도바는 함께 꽃을 감상하였고, 도바의 황후이자 스토쿠의 어머니인 후지와라노 다마코(타이켄몬인)가 궁녀들과 함께 행렬에 합류하였다. 후지와라 다다미치는 음악대와 노래할 여성들과 함께 수레를 타고 뒤따랐다.[8] 1125년 덴지 2년 10월 천황은 이와시미즈 신사(石清水八幡宮)와 가모 신사(賀茂神社)를 방문하였고, 그 후 히라노 신사(平野神社), 오하라노 신사(大原野神社), 마츠노오 신사(松尾神社), 기타노 텐만구(北野天満宮),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등 여러 신사들을 방문하였다.[9] 1128년 다이지 3년 3월 타이켄몬인이 신성한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엔쇼지(安貞院恩聖寺) 건립을 명령하였다.[10] 이는 시라카와 천황(白河法皇)의 호쇼지(法勝寺)가 세운 선례에 따라 황실의 명령으로 건립된 일련의 "신성한 서원 사찰" 중 하나였다.[11] 같은해 6월 후지와라 다다미치가 세쓰쇼(摂政)의 직책과 의무에서 해임되었고, 동시에 간파쿠(関白)로 임명되었다.[2] 1130년 기요코는 중궁으로 책봉되었다.[43] 천황과 중궁의 부부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자식은 없었다.[43] 호엔 6년(1140년) 9월 2일에 뇨보 효에노스케노 쓰보네가 시게히토 친왕을 낳자, 기요코나 다다미치는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43] 1135년 호엔 원년 7월 7일 상황 시라카와가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4] 1141년 에이지 원년 3월 상황 도바가 39세의 나이로 승려가 되어 출가하였다.[2] 궁내청(宮内庁)은 이 장소를 스토쿠 천황의 능묘(陵墓, mausoleum)로 지정하고 있다. 공식 명칭은 시라미네노미사사기(白峰陵)이다.[13] 3. 2. 양위 강요와 호겐의 난겐에이 2년(1119년)에 태어난 스토쿠 천황은 호안 4년(1123년)에 도바 천황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6][7] 다이지 4년(1129년), 시라카와 법황이 승하하면서 도바 상황이 인세이를 시작했다.[43] 도바 상황은 후지와라노 나리코(비후쿠몬인)를 총애하여 에이지 원년(1141년)에 스토쿠 천황에게 양위를 강요하고 나리코의 아들 나리히토 친왕을 즉위시켰다.[43]고노에 천황은 스토쿠 천황의 중궁 기요코의 양자이자, 스토쿠 천황의 '황태자' 자격으로 즉위했지만, 양위 문서에는 '황태제(皇太弟)'로 기록되어 있었다.[43] 이는 스토쿠 천황에게 큰 한으로 남았다. 규주 2년(1155년), 고노에 천황이 17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후계자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시게히토 친왕이 유력 후보였으나, 비후쿠몬인 등의 책략으로 마사히토 친왕이 즉위하였다.[44] 이는 신인이 인세이를 행하게 될 경우 자신의 입지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비후쿠몬인과, 신인의 총애가 기요코에서 효에노스케노 쓰보네에게 옮겨간 것을 원망하던 기요코의 아버지 다다미치, 권력을 장악하려던 신제이 등의 책략이 작용한 결과였다.[44] 호겐 원년(1156년) 도바 법황이 사망하자, 스토쿠 상황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으나, 고시라카와 천황 측에 패배했다.[45] 스토쿠 상황은 시라카와기타도노(白河北殿)에서 기요모리등 고시라카와 천황측의 야습을 받고 도망쳐 행방을 감추었다.[46] 이후 시코쿠(四国)섬에 있는 사누키 국(현 가가와현)으로 유배되었다.[12] 3. 3. 사누키 유배와 죽음스토쿠 천황은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 패배한 후 시코쿠섬에 있는 사누키국(현 가가와현)으로 유배되었다.[31] 유배지로 떠날 때, 스토쿠 상황은 무사 수십 명에게 에워싸인 수레에 실려 도바에서 배를 타고 이동했다. 이때 동행한 것은 총비 효에노스케노 쓰보네와 몇 안 되는 궁녀들뿐이었다고 한다.[31]《호겐모노가타리》에 따르면, 스토쿠인은 사누키에서의 연금 생활 속에서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극락 왕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오부대승경(五部大乘經)을 사경했는데, 호겐의 난에서의 전사자 공양 및 반성의 증거로 자신이 직접 사경한 다섯 사본을 교토의 절에서 거두어 공양해주었으면 한다고 조정에 보냈으나, 고시라카와 상황은 저주의 뜻이 담겨있다 의심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돌려보냈다.[47] 격하게 화를 낸 스토쿠인은 자신의 혀를 물어 뜯어 그 피로 "일본의 대마(大魔)의 연(緣)으로 태어나, 황제를 잡아다 백성으로 만들고 백성을 황제로 만들 것이다." "이 경을 마도로 회향(回向)하노라."라고 불경 사본에 썼다고 한다. 이후 손톱이며 머리카락을 마구 길러 야차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전해진다.[33] 하지만, 《이마카가미》에 수록된, 스토쿠인이 사누키에서 지었다는 노래들을 보면, "외로운 생활 속에서 슬픔만 남아, 병이 쌓여 해마다 무거워져 가네"라고 한탄한 식의 노래는 남아있지만, 유배당한 처지를 분노하거나 원한을 품었다는 식의 노래는 없다.[34] 조큐의 난으로 천황과 두 상황이 모두 유배당하자 사람들은 이 오부대승경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스토쿠인의 저주가 이루어졌다고 수군댔다. 스토쿠인이 사망하고 19년이나 지난 뒤에 오부대승경의 존재가 등장하고, 경전의 실물을 봤다고 하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피로 썼다는 오부대승경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49] 스토쿠 상황은 1164년 8월 26일, 유배지 사누키에서 46세로 사망했다.[31]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교토에서 온 암살자인 미키 치카야스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곳에 야나기다(다이쇼 10년 1월 후카무라촌 건립)로 된 비석이 세워져 있다.[31] 궁내청(宮内庁)은 가가와현 사카이데시에 위치한 스토쿠 천황의 능묘를 시라미네노미사사기(白峰陵)로 지정하고 있다.[13] 4. 원령 전설과 숭배
스토쿠 천황이 사누키 국에서 사망했을 때, 고시라카와 천황은 그의 죽음을 무시하고 조정 차원의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37][38] 조정은 스토쿠인을 죄인으로 인식했고, 그의 원령에 대한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5. 평가 및 영향
5. 1. 긍정적 평가5. 2. 부정적 평가5. 3. 현대의 재조명6. 재위 중의 연호7. 각주
참조
[1]
웹사이트
崇徳天皇 (75)
http://www.kuna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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